온라인 독자투고

서울공화국만 따르는 지방의 아파트 미학·욕망과 지역자치의 실존

2024.08.23

서울공화국만 따르는 지방의 아파트 미학·욕망과 지역자치의 실존

<최성희 작가의 아파트 작품>

 

지역에서 서울공화국의 스펙터클을 닮은 아파트에 거주하고 욕망하고 소비하는 것을 정말 진지하게 질문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 같다. 그저 아파트라는, 집 위에 집을 탐욕스럽게 쌓아 올린 욕망의 바벨탑이 정말 지방인들의 욕망일까? 또다른 질문은 지역의 아파트에서 거주하고 소비하는 것은 정말 내가 원한 것인가?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가 말한 것처럼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 욕망 덕분에 인간은 존재할 수 있다. 욕망은 우리 삶의 다양한 그림과 갈등을 그리고 모든 활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방대학생의 경우 무시와 불의를 넘기 위해 서울공화국을 상당하게 욕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울공화국을 욕망하기 이전에 푸코의 자기 배려(Selbstsorge)’처럼 주체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관여적인 염려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호네트는 먼저 인간이 자신의 욕구나 느낌을 가치있는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하게 자신의 심리적, 정서적 경험을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먼저 긍정해야 한다”(Honneth, 2005)는 명제로 연결된다. 이런 방식의 자기 인정은 자신을 문제로 삼을 수 있는 인간에게만 허락된다.

그것은 자신을 객관적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일과는 거리가 있다. 이는 호네트가 푸코의 자기 배려나 하이데거의 염려(Sorge)’로 표현했듯이 인간이 자신의 본래적이고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자문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고뇌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자기 본래의 목적과 독특함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인간이 이러한 자기 관계에 놓여있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거나, 자기와 세계의 관련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기서 호네트는 개별적 인간이 다른 존재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며 세계와 실존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하이데거의 세계에 대한 실존적 관심을 일부 수용한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때로는 자기실현을 위해 자신의 특수한 능력과 속성을 인정받으면서, 또 때로는 공동의 목적에 근거한 사회적 가치평가로부터 무시된 경험을 드러냄으로써 불의에 함께 저항하는 연대를 형성한다(Honneth, 1992)

관련된 또다른 질문은 지방의 아파트 건축미학은 정말 자치의 예술인가?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인간의 자아가 유아기를 지나며 개인의 내밀한 영역(상상계)에서 언어와 사회의 영역(상징계)으로 진입한다고 했다. 이미 존재하는 타자의 질서 속에서 자아가 형성된다고 본 것이다.

권력을 가진 기성의 언어에 포섭되지 않으면 자아의 존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히 드러나는 분야가 예술이다. 평론가나 매체, 다른 예술가 등 예술계의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예술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파트 건축의 경우는 더욱 심한데, 지방의 좋은 아파트로서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은 늘 서울을 모방하는 것에 머물기 때문이다. 서울과 지방의 인정투쟁에서 지방의 아파트는 늘 서울 닮기를 통해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지방에서의 아파트 건축미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그저 서울 아파트가 주는 환상을 풍요에 대한 환상으로 변질시키고, 그 풍요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호도하면서 그릇된 환상을 유포하는 것이 지방 아파트의 특징인 것 같다. 이럴수록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이 지적한 것처럼 자신을 시장에서 판매하기 좋게 내걸린 어떤 상품처럼 인식하는 시장 지향성(marketing orientation)’ 현상만 커지면서 지역의 인간 소외가 심화되는 것 같다.

결국 욕망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서울 아파트가 강요하는 기호의 논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타자의 욕망이 욕망을 만든다는 라캉의 욕망이론은 현대 소비사회에서 상품논리가 확장되는 현상을 기호화 논리로 설명하면서 이것에 따라 소비욕구가 팽창한다는 보드리야르의 문제의식과도 맞닿는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소비사회에서 인간의 욕망은 기호의 놀이에 수용되면서 기호가 부여한 의미를 좇는다. 사물과 상품은 기호가 되면서 유통, 구입, 판매, 취득되는데 이것은 매스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일반화되고 체계화된, 소비사회의 특징적인 행동이다. 기호의 논리가 소비활동을 규정한다는 말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말하는 라캉의 언명과 상통한다. 언어가 이 대상에서 저 대상, 이 주체에서 저 주체로 욕망을 이동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욕망의 대상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타자의 욕망을 맹목적으로 좇는다. 욕망이 그 뿌리와 본성에서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말은 욕망이 언어에 의해 발생하고 그것에 의존하면서 그 너머를 동시에 지시하는 식으로 표현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인정에 만족하지 않는데 그것이 결국 우리 존재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역민들은 지속적으로 질문해야 할 것이다. 아파트를 사기 위해 노력한 삶은 진짜 나의 욕망의 실현인가? 해운대 사는 사람들도 할 수만 있다면 서울 강남을 모방하며, 전세금 등을 탈탈 털어 영끌로 서울에 아파트 분양을 받았다. 우리는 그만큼 남들도 원하는 것, 남들만큼 사는 것, 남들보다 더 잘 사는 것을 욕망한다. 우리의 욕망이라는 것을 돌아봤을 때 그것을 바라봐 주는 타자가 없다면 그것이 의미가 있을까.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의 말을 빌리자면 나를 바라보는 것들이 나를 존재케 하는 것들이다.

결국 실존이 자신 앞에 펼쳐져 있는 인생 여정에 귀 기울여야함에 있어서, 지역의 실존은 누군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인생에서 자신이 자신답게 살려면 보다 깊이있는 욕망에 대한 메타인지, 소크라테스식 검토,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소크라테스가 강조하는 성찰적 삶이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성찰함으로써 공동체가 추구해야 하는 정의와 가치에 대해 숙고하는 것을 말한다. 삶으로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자기인식’(gnothi seauton)자기 돌봄’(epimeleia heautou)이라는 목표를 향한 단계 또는 수단이기도 하다. 이는 사회 안에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훼손당하지 않으면서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기 삶을 사는 일과 관계한다. 오늘날 만연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삶대신 오롯이 혼자서는 실존을 살아내는 것이 지역인에게 더욱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최용성 박사는 부산대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일했으며, 부산대, 부산교대 윤리교육과에서 가르치고 있다. 자치분권, 직접민주주의를 핵심가치로 하는 부산자치당의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