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휴먼적 동물 공존 아파트를 꿈꾸며
2024.08.23
포스트휴먼적 동물 공존 아파트를 꿈꾸며
<최성희 작가의 아파트 작품>
1500만 명이 반려동물을 키우고 ‘나만 고양이 없어’라는 말이 유행하는 지금은 어느 때보다 동물을 사랑하는 데 진심인 시대이지만, 역사상 가장 많은 육류를 소비하고 동물의 거주 공간을 보살피지 않는 시대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개나 고양이는 사랑하지만 동물을 배제한 채, 아파트를 사기 위해 노력한 삶이 진짜 나의 욕망의 실현이었던가를?를 질문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자크 라캉(J. Lacan)은 욕망의 척도는 타자라고 했다. 주체는 부재하는 것을 욕망하고, 인간중심적 시선 가운데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남들이 원하는 것, 남들만큼 사는 것, 남들보다 더 잘 사는 것을 욕망했던 과거를 내려놓을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이 남긴 말은 "남의 욕망만 채워주며 살지 마라"는 윤리적 명령을 상기시킨다.
이런 윤리적 명령과 함께 좀 더 동물의 시선, 관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자크 데리다(J, Derrida)는 벌거벗은 채로 고양이를 마주해 수치심을 느꼈다고 하는데, 동물에게 거주 공간을 제공하지 않는 우리들은 무언가 미안함을 가지고 도시의 공간에 거주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이데거(M. Heidegger)는 동물이 인간적인 것을 결여한 채로 세계 빈곤 속에 존재한다고 표현했는데, 동물은 지역사회라는 공생의 공간에서 거주 빈곤 속에서 존재했던 것이 아닐까?
코로나 19때 전지구적으로 경험한 것처럼, 사람들이 자택에 격리되어 나오지 못할 때, 도심 속에 근근이 숨어 살던 동물들이 인도와 차도로 천천히 존재를 드러내었다. 대한민국의 지역들이 지역 소멸 시대에 처하고 있고, 지역에 거주하는 인간들의 소멸도 가속화되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는 이미 동식물로 가득한 정글이 되지 않을까? 지역사회에 인간은 줄어들고, 현대 도시의 아파트 숲 뒤에 숨겨진 동식물의 숲이 번성할 그 날이 올 것이다. 의외로 회복탄력성이 강한 동식물이 인간의 빈틈을 활용해 생명을 꽃피워 나갈 때, 우리는 어떻게 공존하고 거주해 나갈 것인가?
우리가 조금만 감수성을 가지고 동물과의 공존을 모색한다면 도시의 거대한 아파트 숲도 다양한 동식물의 안식처로 기능하지 않을까? 기존의 인간중심적 시선을 내려놓는 포스트휴먼적 관점을 가지고, 동물들의 안식처, 아파트의 거주공간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기후위기, 인류세 시대, 지역소멸 시대에 동물과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면,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바벨탑스런 아파트를 새롭게 구성하면서 동물과 공존하며 거주하는 공간으로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동물은 인간에게 지배당하거나 보호받거나 해방되는 존재가 아닌, 지구라는 삶의 터전을 공유하는 공동생활자인데, 부동산 바벨탑, 아파트 바벨탑의 시대에는 지역사회에서 배제당하기 쉬운 공동생활자였다. 개를 ‘소중한 타자’이자 ‘반려종’이라고 선언한 도나 해러웨이((D. J. Haraway)의 동물관계론에 의하면, 인간은 동물을 보호하거나 해방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공생의 역사를 써온 ‘반려종’이라는 것이다.
개와 인간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조우해 함께 공생의 역사를 써온 공생 관계에 있었는데, 부동산 바벨탑의 시대에도 개와의 관계는 그나마 공생의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새들도 적응을 잘 했던 것 같다. 도시화는 최고 가속도로 진행됐고, 초고층 아파트 숲이 도시를 뒤덮어도 새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송골매는 허공에서 최고 속도로 질주해 비둘기의 뒷덜미를 낚아채고, 생활력이 강한 까마귀, 까치들은 여전히 살림살이를 잘 해왔다. 혼란스러운 도시 풍경 속에서도 동물은 교잡하고 적응하며 유기체로서의 자신의 생명을 지켜나왔다. 지금까지도 도시와 자연은 분리되지 않으며 오직 ‘도회적인 자연’만이 남을 뿐이다. 이제 인간의 선택은 자연과 융합해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그러나 광범위한 지역이 소멸되는 시점이 되면, 좀 더 성찰적 도시화의 전망 가운데 동물과의 공존을 모색해야 할 것 같다. 도시로 들어오는 동물들에게 인간중심적 시선을 내려놓고, 도시 환경을 동물에게 더 우호적으로 만드는 일을 상상하고, 기획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버려진 아파트 부지와 텅 빈 옥상, 굵은 철사로 엮인 울타리 뒤쪽, 불모지의 콘크리트 틈새, 철로 옆의 가느다란 땅, 거대한 두엄과 쓰레기 더미 등 ‘외면당한 땅’을 방치하지 않고, 동물들이 좀 더 동물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공존의 거주 방안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지역 소멸 시대에 인간들의 거주 공간도 깊은 상상력과 독창성이 필요하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R. Barthes)는 『현대의 신화』에서 자본주의 가치를 반영하면서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신화라고 비판하는데, 부동산 불패 신화가 해체될 지역소멸의 시대, 아파트 공간을 동물과 거주하는 공간으로 구성해 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이데거적 거주의미를 통해 거주에서 나타는 공간적 특성을 살핌으로서 일상의 삶에서 동물과 함께 인간의 거주를 더욱 발현시키는 건축적 공간을 구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금보다는 동물과의 경계공간을 많이 해체하고 타자와 외부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구체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동물과 인간이 좀 더 교감하는 건축공간을 구성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거주하는 인간은 동물을 포함해 세계와의 관계아래 자신을 인식하고, 동물이란 타자와 주변세계를 의미 있는 관계로 형성해가며 거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역 소멸시대에는 포스트휴먼(posthuman)적 탈 인간중심주의로 동물이란 타자를 수용하며 주변세계를 유입시키는 공간이 필요하며, 인간이 참여되고 교감되는 장소가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라캉의 욕망이론을 하이데거식으로 변주하자면 나를 바라보는 것들이 나를 존재케 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욕망의 주체인 나는 주체적으로 자신을 욕망하기보다, 그 사회가 공유하는 욕망의 가치에 휘둘리게 된다. 이 욕망은 오롯한 나의 욕망이 아니기에 아무리 추구해도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욕망 자체를 욕망하게 된다. 욕망 자체를 욕망하는 것 `아파트 구매'의 내용이기도 했다.
인간중심적 시선 가운데 아파트 구매에 올인한 욕망이 타자의 욕망일 수 있을 진데, 차분히 성찰하면서 동물과 거주할 수 있는 동물 아파트 공간을 상상하는 것은 의미있는 기획일 수 있지 않을까? 기존의 아파트 욕망은 타인의 눈치만 보고 사는 인생, 타인의 기대에만 부응하는 인생은 부질없는 삶을 보여주었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삶에 익숙해지고 그런 삶을 오래도록 지속하다 보면 점점 자기 자신은 나약해지고 의존적인 성향으로 변하게 된다는 얘기다. 동물과의 공존을 꿈꾸는 인생은 무언가간 인간중심주의를 너머서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삶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고민해 본다. 지역에서 아파트에 거주하고 욕망하고 소비하는 것을 정말 진지하게 질문하고, 대안을 상상하는 시대를 도모하되 동물과의 공존을 꿈꾸며.
최용성 박사는 부산대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일했으며, 부산대 부산교대 경성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자치분권, 직접민주주의를 핵심가치로 하는 부산자치당의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