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덕서우봉에서
2026.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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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끝에 봄이 있었다 — 함덕 서우봉에서
가족여행으로 2월 중순 제주를 찾았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끝에는 분명 봄이 묻어 있었다. 매섭게 스치다가도 어느 순간 힘을 풀 듯 부드러워지는 공기였다. 겨울이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으나, 계절은 이미 방향을 틀고 있는 듯했다.
이번에도 우리는 자연스레 함덕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족들과 제주를 찾을 때마다 자주 머물렀던 곳이다. 함덕해수욕장의 에메랄드빛 바다는 언제 보아도 마음을 붙든다. 맑은 날에는 옥빛이 투명하게 드러나고, 흐린 날에도 색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도 바다를 곁에 두고 싶어 숙소를 함덕에 잡았다.
해변 옆에 조용히 솟아 있는 서우봉은 늘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오르지 못했던 곳이다. 우리는 그동안 바다만 바라보았지, 그 바다를 내려다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그 봉우리를 걸어 보기로 했다.
입구에는 나무 안내판이 서 있었다. ‘푸른 바다와 예쁜 유채꽃밭이 어우러진 풍경이 있는 곳, 서우봉.’ 지도에는 정상으로 오르는 산책로와 봉우리를 감싸는 둘레길이 여러 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표고 111미터, 둘레 약 3.4킬로미터의 원형 화산체라는 설명과 함께, 예전 진지동굴이 남아 있다는 기록도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평온한 산책로지만, 그 아래에는 다른 시간의 흔적이 겹쳐져 있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먼저 정상으로 향했다. 초입에서 본 바다는 익숙했다. 해변의 반원형 곡선, 낮게 이어진 건물들, 멀리 겹쳐진 산 능선까지 또렷했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물결의 결이 살아 있었다.
중턱에 이르자 흑염소 몇 마리가 방목되어 있었다. 누런 겨울 풀 위에 검은 몸이 또렷했다. 녀석들은 바람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제 자리에서 제 속도를 지키고 있었다. 조금 더 오르니 경시줄이 둘러쳐진 유채밭이 나타났다. 아직 들판 전체가 노랗게 물들지는 않았지만, 돌 틈 사이에서 몇 송이 꽃이 먼저 피어 있었다. 주변은 겨울빛이 남아 있었지만, 그 작은 노란색은 이미 계절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정상에 서자 풍경은 또 한 번 달라졌다. 해변과 마을, 도로와 공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까이에서 보았을 때는 건물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지만, 위에서는 전체의 흐름이 먼저 보였다. 파도의 결은 사라지고, 대신 수평선이 길게 남았다.
정상을 내려와 우리는 둘레길을 걸었다. 봉우리를 감싸듯 이어진 길은 완만했지만, 시야는 계속 변했다. 어느 구간에서는 바다가 중심이 되었고, 조금 더 걷자 마을이 또렷해졌다. 길이 방향을 틀 때마다 풍경도 함께 달라졌다.
그때 문득 생각이 스쳤다. 우리는 대개 자기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해변에 서 있을 때는 물결이 전부처럼 느껴지고, 정상에 서면 넓이가 먼저 보인다. 둘레길에서는 경계가 또렷해진다. 바다는 그대로인데,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 준다.
요즘처럼 생각이 쉽게 갈리고, 말이 먼저 앞서는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만 세상을 판단하면,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된다. 그러나 한 걸음 옮겨 다른 높이에서 바라보면 같은 풍경도 다르게 읽힌다. 정상의 시각, 둘레길의 시각, 해변의 시각이 모두 다르듯이, 사람마다 서 있는 자리도 다르다.
그래서 지금은 무엇보다 다면적 시각을 가지고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필요한 때인지 모른다. 나의 위치만이 옳다고 단정하기보다, 잠시 시선을 옮겨 보는 일. 상대가 서 있는 자리를 상상해 보는 일. 그 작은 변화가 갈등을 줄이고, 대화를 이어 가는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월 중순의 서우봉에서 나는 같은 함덕 바다를 여러 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았다. 바다는 변하지 않았지만, 보는 자리는 달라졌다. 그리고 그 차이가 생각의 결을 조금은 부드럽게 만들었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러나 그 끝에는 분명 봄이 있었다. 우리 사회 역시 차가운 바람 속에 서 있지만, 서로의 자리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더해진다면 그 끝에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