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 시간의 색을 결정하는 공간의 지정학
2025.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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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시간의 색을 결정하는 공간의 지정학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시간 속에서 영원의 가능성을 찾아내려 애를 썼지만, 질베르 뒤랑은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에서 시간은 우리가 절망적으로 갈망하는 충족의 순간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반면에 상상된 공간은 매 순간 자유롭게 그리고 즉각적으로 존재의 지평과 희망을 영원 속에서 재건립한다고 말하고 있다. 작은 골방에서 꼼짝 않고 3일 동안의 낮과 밤을 아무렇지 않게 즐길 수 있는 나로서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도 매우 인상적이었지만(지루한 느낌과 함께!), 뒤랑의 '상상된 공간'에서 여태껏 생각해보지 못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먼저 시간과 공간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는 두 편의 시부터 감상해보자.
시학(詩學)
호르헤 L. 보르헤스(1899-1986, 아르헨티나)
시간과 물로 이루어진 강을 보며
시간은 또 하나의 강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
우리 또한 강처럼 흘러간다는 것과
얼굴들도 물처럼 흐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
깨어있음은 꿈꾸지 않음을 꿈꾸는
또 하나의 꿈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
우리들의 삶이 두려워하는 죽음은, 꿈이라고 부르는,
매일 밤 찾아오는 그 죽음을 느끼는 것.
하루와 일 년에서 인간의 나날과
해(年)들의 상징을 보며
그 해들의 모욕을 음악 한 소절, 작은 중얼거림,
혹은 하나의 상징으로 바꾸는 것.
죽음 속에서 꿈을 보는 것.
황혼 속에서 슬픈 황금을 보는 것.
그것이 가련하지만 불멸하는 시(詩).
시는 여명과 황혼처럼 돌아온다.
때때로 오후에는 어느 얼굴 하나가
거울 저쪽에서 우리를 보고 있다.
예술은 진짜 자기 얼굴이 비춰지는
그 거울 같은 것.
경이(驚異)에 지친 오디세우스는 멀리서
푸르고 소박한 고향 이타카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 예술은 영원의 푸른
이타카이지, 경이의 이타카가 아니다.
또한 예술은 끝없는 강물 같은 것.
흐르고 머물고,
무상(無常)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수정(水晶)이 된다.
끝없는 강물. 그처럼 동일자(同一者)이며 타자(他者)이다.
(김홍근 역, 보르헤스 문학 전기, 381-2)
이타카(Ithaka)
콘스탄티노스 P. 카바피스(1863-1933, 그리스)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 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네 생각이 고결하고
네 육신과 정신에 숭고한 감동이 깃들면
그것들은 너의 길을 가로막지 못할지니
네가 그들을 영혼 속에 들이지 않고
네 영혼이 그들을 따르지 않는다면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그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너의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
크나큰 즐거움과 커다란 기쁨을 안고
미지의 항구로 들어설 때까지
네가 맞이할 여름의 아침은 수도 없으니
페니키아의 시장에서 잠시 길을 멈추고
어여쁜 물건들을 사라
자개와 산호와 호박과 흑단
온갖 관능적인 향수들을
무엇보다도 향수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최대한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
현자들로부터 배우고 또 배우라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너의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고 나서야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기를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아름다운 모험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리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다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고
길 위에서 너는 지혜로운 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가 가르친 것을 이해하리라
(이윤기 번역 추정)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고향 ‘이타카’가 등장하는 두 편의 시에서 보르헤스의 시의 이미지는 대단히 '시간'적이고 카바피스의 시의 그것은 확실히 '공간'적이다. 이러한 시적 미학은,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에서 상상계의 낮의 체제가 시간(죽음)에 대한 공포에 닿아 있는 것이며 밤의 체제는 그 공포를 ‘완곡화’ 하는 것으로서 공간에 대한 상상력에 닿아 있다는 뒤랑의 심오한 통찰을 떠올리게 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미지가 우리의 무의식에서 혹은 상상계에서 우리의 기분을 이토록 좌우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왕 시작한 김에 공간과 시간에 대해 생각을 한반도의 지정학이라는 거시적 맥락에서 조금 더 접근해보자.
예로부터 한반도의 지리적 구조 및 새롭게 부상하는 강력한 국가와의 공간적 구도는 한반도 역사 전개에 커다란 변수가 되어 왔다. 고대 삼국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북방과 해상에 어떤 세력이 존재했느냐에 따라서 한반도의 역사는 요동을 쳤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이것은 '시간에 따라' 공간을 점유한 세력이 바뀐 것이 아니라 공간을 점유한 세력이 ‘시간(역사)을 좌우했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결국, 시간이란 그 자체가 지배성과 절대성을 스스로 가질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상상력의 역동성을 시간과 공간 중 어디에 자리매김해야 할 것인가가 명확하게 일깨워진다. 보르헤스의 ‘시학(詩學)’과 카바피스의 ‘이타카(Ithaka)’에서 시간과 공간을 사유하는 시적 정서가 확연히 다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시간에 대한 막연한 무력감과는 달리 공간에 대해서는 자기 스스로가 변화를 꾀할 수 있다. 그리고 공간에 변화를 일으키는 그 순간 지정학의 요동으로 그 공간에서 시간의 색깔은 어떻게든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거하는 공간의 지형과 구도에 변화를 주는 것도 잠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일상의 시간 색깔에 변화를 가져온다. 비록 여행을 떠나는 것은 그 공간을 잠시 벗어나는 것에 불과할지언정 새로운 공간 경험을 통해 얻은 상상력은 시간의 색을 달리 직조해내는 힘을 선사한다. 짧은 여행이 주는 역동성이 이러할진대 공간의 내부 구조에 변화를 가하거나 공간 자체의 좌표를 달리해보는 것은 더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곧 해가 저물고 2026년 새해가 시작된다. 나라 안팎이 온갖 일들로 여전히 어수선하지만, 고립되거나 늘 익숙하게 틀 지워진 공간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그 시간의 새로운 색깔을 창조해 내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여 머무는 공간의 좌표와 구도를 적극적으로 변화시켜보는 것은 어떨까? 그것이 어쩌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글쓴이 : 이성식 010-5610-2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