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독자투고

부산시립미술관의 이우환 공간을 관람하고

202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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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의 조각 작품, 관계항 시리즈에 대한 소감(1)
돌 한 덩어리와 네모난 철판 한 조각을 절묘한 혹은 뭔가 의미심장한 배치로 공간에 놓아두었습니다. 과연 이것을 조각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의문이 문득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니혼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고 하이데거에게도 심취했었다는 그의 이력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어떤 사유적 맥락으로 돌과 철판을 저와 같이  미학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무엇인가를 환기하거나 느끼게끔 하려는 의도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

작품의 제목들을 보니 "관계항"의 시리즈입니다. 무슨 관계를 드러내려 한 것일까?

하이데거가 근대의 사유를 비판했을 때, 그것은 인류가 구축한 근대 문명이 자연을 쥐어짜는 폭력성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자연을 파괴해서 금광을 채굴하고 석유를 뽑아내는 등의 일련의 모든 근대 문명의 기반이 자연을 대상화하고 도구화하여 오로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적 사유에 기초하고 있음을 하이데거는 경고했던 것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연을 대하는 이러한 태도는 당연히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와 관계지음에도 확대되고 심화 되었겠지요? 돌이켜보면 자연에서 채굴한 석탄으로 증기선을 만들어 대양을 넘나들며 노예사냥으로 근대의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하이데거가 예리하게 포착한 이런 근대의 폭력적 관계가 근대 문명에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어린 시절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이우환 또한 간파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비천한(?) 돌을 녹여 귀한(?) 철을 뽑아내는 거대한 산업 문명에 드리워진 폭력성을, 그는 돌과 철판의 "관계"를 다시 재조명시켜 평화의 관계로 재정립시키고 있습니다.

전시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한없이 평화롭습니다. 그래서일까요무심한 듯 보이는 ""에게서 저는 언제나 인자하셨던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네모난 철판"은 어머니의 헌신과 희생으로 겨우 요만큼 사는 우리의 잘난 모습인 것이지요.

 

이우환의 조각 작품, 관계항 시리즈에 대한 소감(2)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이어 온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근대세계를 열어젖힌 것이라면, 확실히 금속은 그러한 사유적 전통의 적손이다. 그것은 고도로 정련된 지성의 상징이며 그 지성을 태어나게 한 것은 의식적 활동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거대 문명이 비록  이성적 사유의 맥락 위에서 촘촘하게 짜인 '가성비'의 구조물들일지라도 인간은 결코 '가성비'의 관점에서만 설명되거나 취급될 수 없는 복잡 미묘하고 감당키 어려운 존재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이 근대 문명조차도 이제 인간을 서서히 가성비의 구조 판에서 떨쳐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동화된 공장이 로봇과 AI로 인간을  대체하는 것은 사실상 인간 존재가 그 단순하고 무지막지한 잣대로는 감당키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우환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금속 철판이 의식의 세계라면 돌덩어리는 나에게는 무의식의 세계로 다가온다. 의식은 겉으로 드러난 빙산(인간의 전체 정신)의 일각일 뿐이며 인간 존재를 좌우하는 것은 오히려 드러나지 않은 거대한 무의식일 것이다. 만약에 나 자신이 '까닭 없이' 우울하거나 화가 나거나 한다면 그것은 무의식적 반응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무의식을 깊이 들여다보고 돌보아야 한다. 의식이 무의식을 그저 무시하거나 짓누르기만 한다면  과연 행복감을 느끼고 자유로울 수 있을까?
종종 뉴스로 접하는 끔찍하거나 혹은 우울한  사건들이 과연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를 따져보면 오래된 내적 갈등과 분열로 말미암은 사건들이 적지 않다. 이것은 어쩌면 근대 이후 가성비적 사유만을 극단적으로 숭상해온 것과도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돌덩어리와  각진 금속이 함께 정중히 초대되어 평화롭게 앉아 있는 이우환의 작품을 보면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존중하고 배려함으로써 원만하고 원숙해진 정신의 경지를 보는 듯하다. 진정한 평화와 자유인들의 모습이 과연 저러하지 않을까 싶다.

 

이우환의 작품 "점으로부터"에 대한 소감.
이 단순하면서도 난해해 보이는 작품으로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점은 한 공간에 조용히 머물지 않고  반복성과 농도의 차이로 마치 질주하는 듯이 펄펄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정적인 차원이 공간을 배회하고 시간 속을 유영하면서 역동적인 어떤 무엇으로 현상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릇 모든 문자, 심지어 사물과 우리의 문명 자체도  점으로 구성되고 표현되는 것일 터인데 그 핵심 요소를 갖고 작가는 왜 이렇게 단순한 듯 또한 쉽게 이해되지 않게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작가는 혹시 기존의 문자와 말이 내포하고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을 그 문자와 말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드러내 보이고자 시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인식 가능한 세계(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기존의 문자와 말로 표현이 가능할 것이나, 만약 인식 불가능한 세계가 있다면  그것을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표현해낼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드러난 세계가 '기연'의 세계라면 표현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는 '불연'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그 존재를 기연의 수단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그것이 나중에 언젠가는 또한 문자와 말로 표현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면, 역시 문자와 말을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으로 도전하여 사유하고 표현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지금으로서는 전혀 모르는 미지의 문자에 의해 비로소 그려지는 세계이므로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한정된 여지를 남겨서는 안된다. 오직 무한한 여백으로 그 가능성을 열어두긴 하되 또한 결코 무화되지 않을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야만 한다. 그래야만 인간은 교만하지 않게 또한 진부하지 않게 그 세계에 다가가고자 도전하고  이해하기 위한 향상의 노력을 멈추지 않게 될 것이므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하였음에 비춰보면, 결단코 침묵하지 않고 그것에 도전하는 예술가는 역시 철학자보다는 한 수 위의 '방법론'을 소유하고 있는 듯하다. 남의 것을 쉽게 답습하지 않는 전위적 예술가가 이러한 철학적(존재론적, 인식론적) 고민을 깊이 하고 캠버스를 마주하고 있다면, 어떤 미학적 표현으로 캠버스를 채우게 될까? 만약 당신이라면 과연 어떻게 한번 해볼 것인가?

 

이우환의 회화 "선으로부터"에 대한 소감
마치 하늘로 비상하는 듯한 이미지의 이 짙푸른 굵은 선들로 작가는 무엇을 드러내 보이려 하는 것일까? 방향은 왜 하필이면  하늘을 꿰뚫을 듯 수직이며 그 색은 짙고 푸른 것인가? 그리고 그 두께는 결코 약해 보이지도 않게, 또한 지나치게 완고하지도 않게 유연하면서도 힘찬 것인가?
이것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드러낸 것일까? 만약 누군가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넌 누구냐?"라고 질문을 던져본다면 그대는 그리고 나는 과연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우리가 익숙한 것은 '명함'일 터인데 근대인은 스스럼없이 그 명함으로 자신을 설명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은 나에게 무엇이라고 설명할 것인가? 나의 명함을 꺼내서 나에게 보여준다? 그것으로 충분할까? 거기에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축적한 ""가 드러나긴 할 터이긴 하나, 이 위험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어느 순간 '지위'가 사라져버린다면 그때 ''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내가 소유한 두툼한 지갑이 어느 순간 얇아져 버린다면 나는 그 순간 얇아지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차지한 지위의 높낮이와 소유한 지갑의 두께에 따라 좌우되는 사실상 지극히 의존적이고 나약한 존재였단 말인가?
예술가가 내면에서 이런 질문을 마주하였을 때, 그가 도를 닦는 선승이 아니라면 캠버스에 어떤 흔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게 될까?
해가 떠올라 질 때까지 매일 반복되는 하루의 일과, 그리고 달이 차올라 질 때까지 반복되는 무한회귀의 일상들 속에서 인간이란 무엇을 하는 어떤 존재인가? 더군다나 농업 혹은 상업이나 공업을 업으로 하지 않는 예술가로서, 무한회귀의 일상 가운데 그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자각하여 이 세상에 드러내 보이려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우환의 작품 "대화 2018"에 대한 소감
부산시립미술관의 이우환 공간에서 처음 보았을 때, 도대체 이 뭐지? 하는 당혹스러움이 있었지만 팜플렛의 작은 그림을 오랜 시간 바라보면서 차츰차츰 작가가 전

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이런 것이었을까 하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사물에 대한

관조가 빚어내는 힘을 새삼 깨닫게 된다.
두 개의 컵을 작가는 왜 마주 보게 하지 않고 90도로 꺾어 두었을까? 확실히 마주보는 배치보다는 시선의 긴장도는 낮아지고 한 템포를 쉬어간다. 주고받는 것이 말과 시선이든 술잔이든, 다이렉트의 관계보다는 한번 꺾어지는 인다이렉트의 경로를 통해 숨통이 트이는 여유를 얻게 된다. 승패를 갈라야만 하는 대화가 아닐 바에는 주거니 받거니 편안함이 느껴지는 대화란 이런 공간적 배치를 통해서 가능해지지 않을까?
두 개의 컵 색깔은 서로 다르고 각 컵의 색 또한 차츰차츰 옅어지거나 혹은 짙어지는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같은 색의 두 컵이었다면 얼마나 밋밋하였을까? 대화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서로 색깔을 달리하면 '종북'이니 '친일'이니 서로를 배척하고 악마화하는데 여념이 없지 않은가? 제각기 옅어지거나 짙어지는 컵의 색깔은 대화 속에서 내면적 성찰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두 컵의 크기는 서로 엇비슷하다공간 또한 컵에 압도되지 않는 넉넉한 여백을 품고 있다. 일방이 일방을 압도하거나 짓누르는 권력 관계라면 컵의 상대적 크기는 어떻게 그려졌을까? 어떤 무도한 권력을 상징하였다면 공간의 여백은 축소되고 균형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자화자찬하는 지위의 높이와 권력의 크기에 따라 말의 분량도 그 소리의 톤도 달라지는  세태에 비춰본다면, 상호 존중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란 무례하고 일방적인 토크와는 확연히 다른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신은 진작에 죽었고 왕정체제도 이미 사라진 근대의 문명 세계에서도, 신과 왕이 행사하던 '전근대적' 권력은 진화를 거듭하며 자신의 원초적 존재를 언뜻언뜻 드러내고 있다. 감히 '동일화의 폭력'은 누구로부터 부여받았는가? 무도하기 짝이 없는 '시간과 공간의 일방적 점유'는 누구로부터 부여받았을까? 이우환의 의미심장한 구도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우환의 조작 작품 "관계항, 1974"에 대한 소감

살바도르 달리가 녹아 내리는 시계의 이미지(기억의 지속, 1931)를 통해 "기억의 지속"이란 더는 유지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을 때, 그것은 데카르트와 뉴톤으로 시작된 근대가 끝났음을 예고한 것이었다. 하나의 중심이 있는 공간과 절대적 시간이란 근대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한 것이며 그것은 또한 일상에서 폭력으로 작용하고 있었기에 그는 캠버스를 빌어 그 절대적 기준을 녹초가 되게끔 화끈하게 조져버린 것이었다.
달리가 이렇듯 과격하게 자기 시대(근대)를 넉다운 시킨 것과는 달리, 이우환의 접근(관계항, 1974)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달리가 근대적 폭력에 다시 초근대적(초현실적) 폭력으로 맞대응한 것이라면 이우환은 그 시간과 공간의 유래를 사유함으로써 화해와 공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이 '순간'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결코  근대인의 의식과 근대의 문명만이 될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은 심지

어 석기 시대와도 공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 우리는 '새것'이라면 환장을 하지만, 인간의 영혼을 달래주는 것은 사실은 '오래된 때가 묻은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 중심의 근대가 낳은 배타적 시공간이 자연에 대한 착취와 분리, 인간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그 기저에 깔고 있다면, 이우환의 세계에는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고 있지 않으며 근대와 전근대가 조화로이 서로 공존하고 있으며 귀여운 강아지조차 시공의 주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답고 정겨운 광경이 아닌가? 오래된 미래란 이런 것을 두고 말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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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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